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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중원(中原)을 걷다 3 - 조민환 교수와 제자 30인의 하남성 인문학 답사기

관리자 2026-01-29 조회수 42

[특별기획] 퇴임 후에도 이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학문 여정
제3부: 용문의 천불(千佛), 향산의 시인(詩人)
2026년 1월 21일 (수) | 낙양 용문석굴 → 향산사 → 백거이묘 → 왕탁서원
글 · 사진 김덕기 박사

 


 

셋째 날 아침, 낙양의 하늘이 조금씩 개어가고 있었다. 이틀간 쉼 없이 내리던 눈은 멈추었지만, 도시 전체는 여전히 하얀 눈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호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낙양의 아침은 마치 수묵화 한 폭 같았다. 회색빛 하늘, 그 아래 펼쳐진 순백의 세상, 그리고 군데군데 솟아오른 고탑의 검은 실루엣.

조민환 교수님이 로비에서 일행을 맞이할 때, 그의 눈빛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제자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늘은 교수님이 평생 흠모해온 시인의 무덤 앞에 서는 날이었다.

"오늘 일정은 특별합니다.“

교수님이 버스에 오르며 말했다.

"오전에 용문석굴과 향산사, 백거이묘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왕탁서원을 방문합니다. 불교 예술의 정수, 도가적 은일의 삶, 그리고 서예의 극치. 동양 문화의 세 갈래를 하루에 만나는 셈이지요.“

버스가 낙양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눈 덮인 화북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이수(伊水)를 건너 용문으로

약 30분을 달려 버스가 이수(伊水) 강변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답사단의 눈앞에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강 양쪽으로 우뚝 솟은 절벽, 그 절벽 가득 새겨진 수천 개의 석굴과 불상. 용문석굴(龍門石窟)이었다.

"용문(龍門)이라는 이름은 이 협곡의 형상에서 유래했습니다.“

조민환 교수가 강변에 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양쪽 산이 마치 대궐의 문처럼 마주 서 있고, 그 사이로 이수가 흐릅니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용이 드나드는 문, 용문이라 불렀지요. 잉어가 이 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는 '등용문(登龍門)' 전설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협곡을 바라보았다. 과연 양쪽 절벽이 거대한 문처럼 서 있었다. 그 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이수의 물빛은 겨울 하늘을 닮아 잿빛이었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 효문제가 수도를 평성(平城, 현재의 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긴 493년부터 조성이 시작되었다. 이후 북제, 수, 당을 거치며 약 4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은 2,345개, 불상은 10만여 구에 달한다. 둔황 막고굴, 대동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며,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천불동(千佛洞)을 지나며


강을 건너 서쪽 절벽으로 향하는 길, 눈 덮인 계단이 답사단을 맞이했다. 미끄러운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며, 일행은 양옆으로 늘어선 수많은 불감(佛龕)을 지나쳤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어떤 불상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어떤 불상은 사람 키를 훌쩍 넘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닳고 깎였지만, 그 고졸한 미소만은 여전했다.

그러나 모든 불상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목이 잘려나간 불상, 손이 떨어져 나간 불상, 얼굴이 깎여나간 불상이 곳곳에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훼손된 것도 있고, 서양 도굴꾼들에게 약탈당한 것도 있습니다.“

가이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특히 193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골동품상들이 조직적으로 불상의 머리를 잘라갔습니다.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스턴 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전시된 용문석굴의 불두(佛頭)가 바로 그것들이지요.“

제자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조 교수가 조용히 말했다.

"역사의 상처입니다. 하지만 그 상처마저 역사의 일부지요. 우리가 할 일은 이 상처를 기억하고, 남은 것을 소중히 지키는 것입니다.“

천불동(千佛洞)에 이르자 이름 그대로 천 개의 작은 불상이 암벽 가득 새겨져 있었다. 마치 꿀벌의 집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불감들. 그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기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가족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고,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이 돌 위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봉선사(奉先寺), 노사나불의 미소

계단을 더 올라 마침내 봉선사(奉先寺) 앞에 도착했다. 답사단 전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높이 17.14미터에 달하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존불인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자상, 보살상, 천왕상, 역사상이 도열해 있었다. 마치 하늘의 궁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장엄함이었다.

노사나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내린 눈, 살짝 미소 짓는 입술, 풍만하면서도 단아한 이목구비.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비로우면서도 초월적인 미소가 천 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자신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대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반영된 것은 분명합니다. 풍만한 볼, 가느다란 눈썹, 작은 입술. 당나라 시대의 미인상이 이 불상에 담겨 있지요."

그러나 조민환 교수의 관심은 단순한 미인상에 있지 않았다.

"노사나불의 미소를 자세히 보세요.“

교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서양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崇高)'와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입니다. 칸트가 말한 숭고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이지요. 하지만 이 미소에는 압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포용이 있어요.“

제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민환 교수가 설명을 이었다.

"동양미학에서 추구하는 것은 '화(和)'의 경지입니다. 조화로움 속의 장엄함. 대립하지 않고 감싸 안는 아름다움. 노사나불의 미소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를 품어주는 미소. 그것이 동양 불교 예술의 정수입니다.“

도가미학(道家美學)과 동양예술철학을 평생 연구해온 학자의 눈에 비친 노사나불. 제자들은 스승의 시선을 따라 대불의 얼굴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과연, 그 미소에는 위압감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은, 혹은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바람이 불었다. 절벽 위에서 눈송이가 흩날렸다. 노사나불의 미소가 눈발 사이로 더욱 온화해 보였다.


 

강 건너 향산으로

용문석굴 관람을 마친 일행은 이수를 건너 향산(香山)으로 향했다. 다리 위에서 뒤돌아보니, 서쪽 절벽의 석굴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천 개의 불감이 마치 벌집처럼 절벽 가득 새겨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저 건너가 향산입니다.“

교수님이 동쪽 산을 가리켰다.

"용문석굴이 불교의 성지라면, 향산은 시인의 성지지요. 백거이가 만년을 보낸 향산사가 저 산 중턱에 있습니다.“

향산(香山)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향기로운 나무가 많이 자랐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답사단에게 향산은 오직 한 사람, 백거이(白居易)의 산이었다.

눈 덮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미끄러워 서로 손을 잡고 부축하며 올랐다. 고송(古松) 가지마다 소복이 쌓인 눈이 아름다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눈덩이가 떨어져 누군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그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적막한 산사로 오르는 길. 천 년 전 백거이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산에 은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향산사(香山寺), 향산거사의 은거지

산 중턱에 자리한 향산사(香山寺)에 도착했다. 천년 고찰의 위엄이 느껴지는 사찰이었지만, 겨울 산사의 정취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인적이 드문 경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녹은 눈물방울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향산사 경내로 들어서자 눈 덮인 정원이 펼쳐졌다. 오래된 은행나무, 이끼 낀 석탑, 그리고 멀리 이수 건너로 보이는 용문석굴의 웅장한 자태. 천 년 전 백거이가 보았을 바로 그 풍경이었다.

교수님이 걸음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제자들도 조용히 교수의 뒤에 섰다.

"백거이는 이곳에서 자신을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칭했습니다.“

조민환 교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사(居士)'란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도를 닦는 사람을 말합니다. 백거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 향산사에 머물며 시를 짓고 불경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지요.“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당나라 중기의 시인으로, 두보, 이백과 함께 당시(唐詩)의 삼대 거봉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까지 올랐지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성격 탓에 좌천을 거듭했다.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비파행(琵琶行)」은 그 비애를 담은 걸작이다.

만년의 백거이는 벼슬을 내려놓고 이곳 향산에 은거했다. 그리고 '구로회(九老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구로회는 일흔이 넘은 노인 아홉 명이 모인 모임입니다.“